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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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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창세기 50장 24절부터 세 구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마태복음 1장 1-6절까지를 먼저 읽고 16,21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우리는 이전 집회에서 성경에 나오는 신자들에 대해서 특별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숫자 중에서 2라는 숫자 두 가지씩 쌍으로 나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삼중적으로 나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성경에 나오는 4에 대한 숫자와 관련돼서 여러분에게 교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전 집회에서 3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숫자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 관련된 삼위일체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3이라는 숫자에서 4라는 숫자로 넘어와서 보겠습니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4라는 숫자는 3 다음의 숫자입니다. 3 더하기 1 해서 4가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3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하나님 다음에 뭐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에 대한 대답을 성경의 맨 처음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뭐라고 이어져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4라는 숫자는 이 세상과 이 땅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창조물 가운데서 여러 군데에서 4라는 숫자를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사계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 사방 동서남북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지구를 네 방면으로 나눠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을 네 개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방향에 있어서도 네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왕국에 있어서도 네 왕국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식물의 왕국이 있습니다. 광물의 왕국이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왕국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이 사람 숫자가 여러 군데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도 사람 숫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달과 관련돼서 그 차고 기울어짐이 네 개로 나누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4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네 번째 책을 바라볼 때에 또한 흥미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네 번째 장에서 가인의 세계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이제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인으로 특징되어지는 세대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주의적인 시대라는 것을 또한 이 장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만든 도시를 보게 됩니다. 거기서 많은 악기들을 사람들이 개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군사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그런 상품들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이 세상을 꾸려가고 있는 모습이 4장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모두가 창세기 4장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가인의 세계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아주 세속적인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도 또한 동일한 4에 대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창세기 4장에서 계시록 4장에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4장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네 생물을 보게 됩니다. 이 네 생물은 또한 각각이 네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얼굴이 이 피조물의 한 부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4가 이 세상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것을 다니엘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4가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다니엘서 7장에서 동일하게 4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각각의 장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제가 이것만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다니엘서 4장에서는 다니엘이 금으로 만든 신상을 보게 됩니다. 이 신상은 이 세상의 제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7장에서는 네 짐승을 보게 됩니다. 이 짐승들이 바다로부터 차례대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네 괴물은 이 세상의 제국을 다시 한 번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4는 역시 네 개의 복음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내일 저녁 시간에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복음서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돼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고말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헬라인들, 즉 그리스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네 복음서를 합해서 참으로 우리의 구주는 모든 사람들의 구주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의 구주께서 모든 나라와 상관없이 모든 나라 사람들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죄사함이 모든 인류에게 예외 없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라와 상관없는 모든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구주를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로도 영접한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구주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내 개인, 즉 나의 구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오늘 밤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의 서론입니다.

 

성경에 이 4라는 숫자가 아주 많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몇 가지를 선택해서 교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것을 택할지 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들은 제하고 이것들은 제하고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특별히 두 가지의 그룹의 4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성경의 첫 번째 책에 나오는 네 명의 유명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신약 성경에 나온 첫 번째 책에 있는 네 명의 유명한 여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무엇을 이야기할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온 첫 번째 책의 네 명의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에 나온 네 명의 유명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지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단지 어떤 교리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떤 추상적인 내용만 여기에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기에 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참으로 개인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에 계시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사람들의 역사 가운데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그렇게 가깝게 관계를 맺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구약에 나온 첫 번째 책에 나온 네 명의 유명한 남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창세기에 나온 일반적인 용어를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가 인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장부터 50장까지는 특별히 히브리인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첫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부문에서 아주 중요한 네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밤 상세히 다룰 주제는 아니지만 간단하게 이렇게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가 이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죄로 말미암은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므로 인류의 타락의 슬픈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슬픈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로 타락하였고 그리고 그 모든 후손인 우리는 이제 죄 가운데서 태어나게 됩니다. 참으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대를 거듭해서 이 죄 문제가 계속해서 모든 사람에게 끼쳐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저희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부분에서 세 번째 중요한 사건은 노아의 홍수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이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러나 거기에 똑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교만한 가운데 그들이 스스로 높임을 받고자 바벨탑을 쌓았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반역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그들은 완전히 어리석음과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이 세 가지 사건은 지금까지도 그 결과를 미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이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세상에 그 대홍수가 지질학적으로 영향을 미친 그러한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벨탑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 땅 가운데 여러 언어가 있는 것입니다. 영어, 한국어 이런 것처럼 말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그 요람에서부터 생겨났던 아주 초기에 생겨났던 그 사건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주 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처음 11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네 개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부터는 새로운 시작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혼돈으로 가득 찬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 특별한 민족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나라에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들은 이제 다른 세상이 어떻게 될지를 그 전망을 받게 됩니다. 그 특별한 나라가 히브리 족속이고 또한 유대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 족속도 그들의 역사 가운데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족속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그 네 명의 사람은 이 히브리 족속의 초기에서부터 있었던 그 4명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초반에는 네 개의 사건이 있었고 창세기 12장부터는 네 명의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 사람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여기에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가 아브라함입니다. 15장에 그의 이름이 바꿔져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이삭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야곱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요셉입니다. 이 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 히브리 족속을 인도하시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읽을 때 단지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이야기다 이렇게 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 대해서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네 사람의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각각의 네 사람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부터 50장까지 적혀 있는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러면 그가 나타내고 있는 것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란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가운데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바벨론의 그 고대 우상들을 숭배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에 많은 세월 가운데 그는 참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제 세상은 그에게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그 갈대아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와서 그는 100여 년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해 보이십니다. 우리가 그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일곱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두 역시 굉장히 중요한 계시입니다.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린 대로 첫 번째 중요한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을 그가 잠깐 보았을 뿐인데 그 메소포타미아의 화려한 것들이 이제 아무 가치가 없는 그러한 세상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그에게 계시해 보이십니다. 세 번째로는 천지와 땅의 주제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해 보이십니다. 매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욱 분명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15장 1절에서 자신을 방패로 제시해 주십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 이렇게 계시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그 악한 성에 자신의 친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악한 도성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들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에 대해서 온 땅을 심판하실 이라고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은 참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계시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참 우리가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자신을 감추시고 영원토록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잠잠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단지 모서리 형상만 간신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있는 폭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심술 맞은 산타클로스 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 나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그것만큼 나쁜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지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게 될 때에 참으로 그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아브라함만큼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점점 더 알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에게 또한 일곱 번째 이렇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제단에 하나님께 드리고자 눕혀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계시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호와 이레라고 성경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 위대한 이름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죄 제사를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사람 이 이삭은 어떻습니까? 사실 이삭은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그의 인생이 시작된 사람입니다. 그는 약속을 통해 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둘 다 모두 아직 죽은 사람과 같았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나이 든 부부에게서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확률은 어떠한 약속이 성취될 확률보다도 낮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때가 됐을 때 정확하게 그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나이 든 부부의 그 가정에 한 아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죽음과 같았던 이 부부에게 새 생명이 난 것입니다. 참으로 죽어 있던 사라의 자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생명을 잉태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나온 이야기는 또 다시 반복됩니다. 아마도 이삭이 20세의 젊은 청년이었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나무를 베서 장작을 준비합니다. 두 하인과 두 나귀를 데리고 이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그 장작을 이삭의 등에 지게 하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단 위에 놓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장작 위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놓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습니다. 숨을 멈추고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쳐다보게 됩니다. 이제 수초 후면 그 소년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개입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희생 제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었던 그 줄을 풀게 됩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누여 있었던 그 아들이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과 같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망 가운데서 생명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번제단의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이삭에서는 부활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 부활을 가장 잘 보여주고 계신 분은 바로 사망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우리가 이 저녁에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구주께서 다시 부활하셔서 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이제 야곱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참으로 야곱은 성경 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여러 가지 성격이 있는 그런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할아버지가 있는 이 땅 가운데서 70년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제 형처럼 자신을 털이 많은 사람으로 꾸미고 아버지를 속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그는 가나안을 떠나 도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20년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사람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 땅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다시 옛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그 약속의 땅을 20년간 떠나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그 대가를 이렇게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나안 땅을 수백 km 떨어진 곳을 가버린 야곱을 보면서 그가 과연 돌아올 수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그가 돌아오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돌아오게 만든 그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사실 20년 동안 그는 야곱은 떠나서 아주 성공적인 농부로서 일하게 됩니다. 아주 똑똑하게 자기 사업을 잘 운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20년 동안 이제 많은 부를 쌓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약속의 땅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그가 다시 고향 땅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가 그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십니다.  그것은 컴컴한 어둠의 밤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장막 가운데서 자려고 누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존재가 나타나서 그와 이제 씨름하기 시작합니다. 그 어둠 가운데 이 방문객이 누구인지 야고보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름하는 자와 싸워서 이기고자 여러 가지로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그와 같은 질문을 사실 수년 전에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거짓말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가 사실대로 말합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이 정직하게 되는 것이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방문객은 야곱의 고관절을 부러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로 인해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게 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단지 그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되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그는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런 다루심을 받고 그래서 야곱은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에 그는 아주 쩔뚝발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야곱이 이제 다른 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바뀌게 됩니다.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인 야곱의 이름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굉장히 속이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거짓말로 고소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방인의 손에 넘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야곱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땅에서 그들은 모두 쫓겨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짓말로 넘긴 후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땅에서 쫓겨나서 수백 년간 타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향을 떠난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아주 성공적인 사업가가 됩니다. 그래서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겨우 이제 요즘 시대에 와서야 그 유대인들이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야곱이 자신의 고향 땅으로 돌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완전히 그들의 고향 땅으로 돌아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다루시고 그들을 변화시켜야 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다루시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런 일을 위해서 큰 환란을 겪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어려움의 시기를 뭐라고 부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의 시기를 성경은 특별히 야곱의 환란의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야곱이 들어오면서 그러한 것을 겪은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향 땅으로 돌아오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다시 이 야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을 변화시킨 후에 야곱은 그 땅에 돌아오는 것이 허락됩니다. 수십 년의 방황 끝에 그는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야곱에서 어떠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에서는 계시의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부활의 하나님이셨지만 이제 야곱의 관련해서는 회복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 회복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정도를 벗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돌이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 사람, 이 흥미롭고 또한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그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아이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요셉의 인생 가운데서 그렇게 아름답고 우리의 흥미를 끄는 그런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채색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 자체가 그렇게 칼라풀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셉의 그 어려움이 단지 그의 10대 때 일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대 시대가 좀 어려운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요즘 시대에도 어려운 10대지만 성경 시대에는 더 어려운 게 10대의 시대였습니다.

여기 10대 분이 계시다면 이 시대에 10대로 사는 게 어렵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요셉은 기원전 2천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도 10대로서의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의 형들이 그를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멀어지는 걸 보고 형들은 좋아했습니다. 요셉이 점점 노예 상인에게 끌려가는 것을 볼 때에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거라고 좋아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던 그 사람을 이제 없애버렸다라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다시 요셉을 보게 됩니다. 수년간에 걸쳐서 요셉은 계속되는 고난 가운데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형들이 고난을 받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도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이에 요셉의 형들은 그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요셉이 이제 죽었겠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요셉과 형들 간의 다툼은 그들에게 아주 쓴 마음을 요셉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끝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굶주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요 그리고 그때 애굽에서는 풍부한 양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가방을 들고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이 형들이 그 양식을 구하러 찾아왔을 때 그것을 모두 관할하고 있는 그 관리는 아주 점잖은 신사처럼 보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 관리가 누군지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10대에서 중년의 한 남자로 그 나라의 총리로 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들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냥 형편없는 그런 사람으로 그대로 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을 형들에게 이렇게 나타내게 됩니다. 내가 바로 당신이 20년 전에 팔았던 그 요셉입니다. 그리고 이제 형들도 울고 요셉도 울고 그들은 다시 형제로서 재회하게 됩니다.

 

참으로 그 오랜 기간 동안 요셉의 형들과 요셉이 다시 화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시간이 있었지만 그들은 놀랍게 다시 화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이와 같이 한 바퀴를 돌아서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사실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악행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렇게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하나님이시며 회복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다시 화목케 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요셉과 요셉의 형들을 다루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요셉의 형들은 다시 친구로 화목되기 위해서 몇 가지 거쳐야 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와 같은 넘어짐을 겪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이와 같은 관계가 깨질 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아주 가까운 친구 관계가 또한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어진 관계 가운데서 너무나 쓴 그런 관계가 만들어져서 그것이 다시 회복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소망을 버리지 말 것을 교훈받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시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의 편에서는 그들을 용서하기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회개하였고 요셉은 그들을 용서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한 화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화목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이 중요한 하나님과 우리라는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회개하기 전부터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성경의 4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4명의 사람들 그리고 4명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이야기의 시작일 뿐입니다. 다른 네 개 또 다른 네 개는 무엇이냐? 아브라함은 단을 쌓는 것이 특징인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믿지 않으시겠지만 아브라함은 네 개의 단을 쌓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네 개의 단을 쌓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통계의 숫자입니다. 우리가 각각의 네 개의 단을 다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하지만 창세기 12장에 있는 두 개의 단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3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22장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지은 네 개의 단이 기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배드리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경배드리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경배를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네 개의 아브라함의 단을 찾아보시고 스스로 한번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여러분의 단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 아브라함의 인생이 끝날 때에 우리는 이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어디에 단이 있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면서 여기 그 단이 있었구나. 또한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한 단을 쌓게 됩니다. 또한 마므렛에 또 한 단을 쌓게 됩니다. 그 각 장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며 그는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 주신 것을 감사드리면서 단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히 받을 만한 것을 받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수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은 단 한 번도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그 큰 은혜를 주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는 항상 감사드리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이제 이삭을 보겠습니다.

이삭 역시 단을 쌓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26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아주 편안하게 26장을 봐도 그것은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이삭이 몇 개의 우물을 만들었습니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네 개의 우물을 팠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삭은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비가 내릴 때 그 물을 저장할 우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강이 많은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우물의 땅입니다. 참으로 많은 양의 물이 땅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나는 이 약속의 땅에 거할 것이고 그래서 내 가족과 내 가축을 위해서 우물이 필요하다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신선한 물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할 수 있는 일은 팔을 걷어붙이고 이제 우물을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물을 계속해서 흙을 퍼 올리고 돌을 들어올려지고 그는 이제 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땅을 파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사용하고도 남을 풍부한 양의 물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것은 이 책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땅을 파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 청년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성경에 있지만 거기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똑같은 성경책을 보고 있지만 저는 거기서 바다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물을 만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땅을 파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을 판다는 것은 정말 너무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너무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것들을 다 들어올려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스러기들을 다 건져 올려 퍼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시간을 그런 겉에 있는 먼지들, 그런 돌들, 그런 것들로만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훈련해가지고 그 성경을 파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우물을 파다가 물을 만나는 그 기쁨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임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단지 내 자신의 필요만을 위한, 내 자신을 생기있게 만드는 데 필요한 물만 발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그들을 또한 신선하게 하는 물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 그 약속의 땅에 머무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땅으로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땅을 파면서 그 땅에 완전히 만족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임을 떠나면서 이곳에는 더 이상 내가 얻을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기서 계속 이 땅을 파고 있다면 여러분을 신선하게 하는 줄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말씀을 보게 될 때 야곱은 기둥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야곱이 몇 개의 기둥을 세웠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개입니다. 그는 창세기 28장에 벧엘에서 기둥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31장 길르앗에서 기둥을 또 하나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35장에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시 그 장소에 가게 된다면, 장소가 아니라 여기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기둥은 야곱이 여행한 그 길에 특별한 장소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기둥은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각각의 기둥은 야곱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벧엘에서 그가 꿈꿀 때에 천사들이 하늘에서 오르락내리락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경험의 시작 지점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야곱은 거기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 순간을 기둥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수년이 지난 후에 그 기둥을 바라보면서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추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그때 내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구원의 순간의 기둥은 그의 기억 속에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참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기억하면서 그날 아침 또는 그날 점심, 그날 밤에 내가 하나님을 만났었지라고 그 기억을 추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기둥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야곱의 기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아내 라헬이 죽었을 때 야곱은 나헬을 사랑했습니다. 그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 앞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또 다른 하나의 특별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슬픔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슬픔의 때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두운 순간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의 기둥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야곱은 네 개의 기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요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옷과 관련해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입고 있던 채색옷을 벗겨서 그것을 이제 짐승의 피를 묻혀 그가 죽었다라고 형들은 거짓말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또한 보디발의 아내 손에 붙잡힌 그 옷을 벗어버리고 요셉이 도망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또한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감옥에 문이 열리면서 바로가 너를 보길 원한다라고 말했던 순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를 보러 가게 됩니다. 그 바로 왕 앞에 나갈 때에 그는 감옥의 옷을 입고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요셉은 이제 그 둘째 마차의 수레에 태워져서 성경은 기록하기를 세마포 옷을 입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소년으로서 옷을 입었고 그리고 감옥에서 옷을 입었습니다. 궁궐에서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총리로서 옷을 입게 됩니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셋 네 개의 옷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처음 성경책에서 4라는 숫자가 아주 유리하게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신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 네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 계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요셉의 옷에 대해서 그 의미가 그의 가치, 합당함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받는 아들로서 채색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청지기에 합당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총리로서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들은 모두 그의 성품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사 우리가 요셉과 같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합당한 그런 인격과 성품을 갖추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에 나타난 네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에 나온 4명의 여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