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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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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시 한 번 이와 같이 많은 분들이 집회에 참석해 주셔서 저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또 많은 낯익은 얼굴들이 계시고요 또 여러 모임에서 참석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복주셔서 우리가 함께 말씀을 상고하는 이 시간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민수기 처음 몇 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몇 구절을 1장에서 2장에서 선택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장 1-3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 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그리고 17절과 18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지명된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월 일일에 온 회중을 모으니 그들이 각기 가족과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그 명수를 의지하여 자기 계통을 말하매”

 

그리고 20절에는 르우벤의 아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은 시므온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갓의 아들들이 24절에 나옵니다.

26절은 유다의 아들들입니다. 28절은 잇사갈의 아들들이며, 30절은 스불론의 아들들입니다.

32절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의 아들들입니다.

34는 므낫세의 아들들입니다. 36절은 베냐민의 아들들입니다.

38절은 단의 아들들입니다. 40절은 아셀의 아들들입니다. 42절은 납달리의 아들들입니다.

45절과 46절을 읽겠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그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다 계수함을 입었으니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그리고 54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리고 2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

 

3절은 동방 해 돋는 편에 유다의 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은 남편의 르우벤 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의 진과 함께 모든 진의 중앙에 있어 진행하되 그들의 진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그 위치에서 그 길을 따라 앞으로 행할지니라.”

그리고 18절은 서편에 있는 에브라임의 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북편에는 단 군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32절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라아살은 레윈의 족장들의 어른이 되고 또 성소를 맡을 자를 통할할 것이니라.”

 

2장 마지막 두 구절을 읽겠습니다. 2장 33-34절입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가족과 종족을 따르며 그 기를 따라 진치기도 하며 진행하기도 하였더라.”

 

지금 먼저 이 읽은 구절들을 교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교제를 하면서 다른 성경의 부분들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민수기 말씀을 읽을 때에 유명한 선교사인 데이빗 리빙스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는 그곳을 떠나서 아프리카 중심부에서 선교사요, 또한 탐험가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탐험을 하는 가운데에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 어려움들은 그 사나운 원시 종족들과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글에 위험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벌레들과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여러 모험 끝에 그는 잉글랜드로 그의 보고서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톤 박사에게 잉글랜드에서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제 당신이 그 어려움 가운데서 집에 돌아올 때가 된 것 같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본국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계속해서 그 일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리빙스톤 박사는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저는 여기 전진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수기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내산 광야 앞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건넜던 그 홍해는 그들의 뒤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책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전진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동기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지역 모임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항상 전진하는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쉽게 우리가 진보한 그 위치를 빼앗기기 십상입니다. 진정한 진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과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은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 민수기 책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턴 박사는 이와 같은 편지를 더 보냈습니다. 그 선교사를 보낸 위원회는 리빙스턴 박사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동역자를 보내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곳에 가서 그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를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어떠한 어려움들이 있는지를 그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위원회는 선교사를 돕기 위해서 한 사람을 보내면서 거기에 어떤 좋은 길이 있는지를 찾아보라고 돕기로 하면서 글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리빙스톤 박사는 그 답변을 다시 하면서 ‘저는 좋은 길이 있는 것을 찾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길이 없는 데를 가고자 하는 사람을 원합니다’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수기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 광야에 200만의 사람들이 길이 없는 그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광야에서 살아남은 역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를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진보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우리도 2023년에 사는 이 시대에서도 역시 우리도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진보하는 것이며 단지 그것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교제를 하면서 우선 전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잠시 시간 동안에 이 민수기가 어떤 문맥 가운데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마포 모임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새로 오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짤막하게 한 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전부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몇 가지 특정한 주제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민수기는 이 성경에 처음 나온 5개의 책 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책입니다. 타락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은 관에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게 됩니다. 창세기는 동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무덤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점점 하강해 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동산은 생명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무덤은 죽음을 말하는 장소입니다. 바로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명의 이야기가 이제 죽음의 이야기로 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기에서는 다른 사건이 전개됩니다. 바로 이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구속이라는 위대한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이 출애굽기는 종되었던, 노예되었던 곳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소로 마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속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죄의 노예들을 이제 하나님의 성소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레위기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레위기는 관계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제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많은 희생 제사들을 다루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피가 있는 희생 제사만이 죄인들을 하나님과 좋은 관계로 유지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레위기에 나온 그 거룩한 것들을 우리가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 성소 안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실제 생활 가운데서 이 광야라는 세상을 지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여러 삶의 책임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민수기는 책임을 말하는 책입니다. 이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그리고 그들이 해야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가 되겠습니다. 이 책은 이 앞에 나온 모든 책들의 결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반복이라는 책입니다. 사실 이 신명기라는 것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모세는 그 전 세대에 주었던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말하게 됩니다.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과 같은 집회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민수기에서는 아주 슬프게도 사람들이 계속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민수기가 성경의 앞부분에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민수기에 대해서 개요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민수기는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지난밤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간략하게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장부터 10장까지는 사람들을 준비하기 위한 그런 필요한 것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곧 살펴볼 이 민수기의 전반부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보를 위해서 그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 진보를 위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전진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그 이유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전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안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주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 구주께서는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성령님이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이 성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1장부터 10장까지 이와 같은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그런 기간입니다. 11장부터 갑자기 슬프게도 그러한 전개가 완전히 방향을 틀게 됩니다. 아주 잘 준비된 그런 백성들이 이제 그 가운데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반역적인 그런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백성들로서 그들은 전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계속 자기 꼬리만 쫓아다니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이 자주 일어납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20장 마지막에 가보면 이와 같이 잘 준비되었던 사람들이 조금의 전진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것은 외부의 다른 적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전진하지 못했던 것은 블레셋인 때문도 아니고 가나안 인 때문도 아니고 미디안 사람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의 근원은 그들의 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불만과 그리고 원망하는 것으로 그들은 진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고 그들은 시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큰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적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함입니다. 시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 내적인 대적들이 외부의 적들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냅니다.

21장에 다시 한 번의 큰 변화가 있게 됩니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 실패한 세대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대, 두 번째 태어난 이 세대가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두 번째 세대에게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세대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자원들을 그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항상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제 민수기의 앞에 장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앞 부분에서 세 개의 주제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이 진보를 위한 장소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시내 광야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광야라는 것은 아주 어려움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많은 위험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배고픔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 광야가 가지고 있는 이 어려움들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진보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운데서도 이 백성들이 진보할 수 있게끔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진보하지 못할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을 탓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진부하지 못하는 변명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자주 변명합니다. 내가 지금 이 어려운 모임 가운데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전진할 수 있는지 그 상황을 알지 못합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어려운 결혼 생활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내가 전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 어려운 직장 가운데 있는데 어떤 진보를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이런 변명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문제가 없는 이상적인 상황을 꿈꾸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 만약에 더 쉬운 상황이 되면 내가 잘 할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놀라운 진보를 이룬 사람들은 엄청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것을 뚫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운 광야라는 환경 가운데 사람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보하도록 거기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광야라는 환경 가운데서도 여러분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서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장소는 진보를 위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진보를 위한 가능성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와 같은 장소에서 그런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1장 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이 진보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이유를 찾게 됩니다.

다시 1장 1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2년 2월 1일에 여호와께서 신의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 구절의 마지막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 우리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입니다. 그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로 지낼 때는 그들은 어떠한 진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노예로서 아주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올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구원받고 나서 광야에서 단지 멸망하도록 하나님이 건지신 것입니까? 천 번이나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진보하도록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밖으로 건져내신 것뿐만 아니라 그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시도록 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밖으로 내시고 안으로 들여보낼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가운데 통과해 가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과거에 어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우리는 죄 굴레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에서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 가운데서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용기를 얻길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들이 어떻게 진보할 수 있는지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에 맨 처음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안내자로서 그들에게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러한 진보가 가능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난 후에 단지 그냥 사람들의 생각으로 살아가도록 그렇게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의 논리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이제 우리를 진보하도록 이끄는 길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셨다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2장 1절을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리고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그리고 5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4장에 1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5장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장 1절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7장 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8장 1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또한 9장 1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장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장 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장부터 10장까지는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는데, 갑자기 11장에 와서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 대신에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이제 진보는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민수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우리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즉시로 헤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이것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성경은 단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해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닙니다. 그냥 단지 지적인 흥미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에 등불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비결인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러한 장소에서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장 1절에서 다시 한 번 이 진보가 가능한 세 번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것을 “시내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회막에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제 2년 2월 1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보면 1월 1일에, 2년에 1월 1일에 그것이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점이 그 성막 가운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벌써 1개월째 인지하고 있는 시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광야의 장소에서 그들이 전진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이것과 관련된 흥미로운 것들을 빠르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40장 34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고” 35절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성막이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그 성막 가운데 임하시고 바로 하나님께서 그 장소에 계시는 것입니다. 성막이 세워지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고 모세는 밖에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성막이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안에 계시고 모세가 밖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밖에 있는 모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 1절에서는 그 성막 가운데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성막으로부터 밖에 있는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여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1장 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위기에서는 “회막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는데, 민수기 1장 1절에서는 “회막 안에서 부르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는 레위기처럼 모세가 밖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밖에 있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민수기에서는 모세가 회막 안으로 들어와서 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셨고, 그리고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오게 된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진보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에게도 지금 여기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그처럼 나에게 가까이 계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그 성막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그리고 그 성막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특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뒤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 가운데 구름으로 계시는 그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성막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성막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각각의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으로 돌아가신다 할지라도 여러분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음 주에 학교를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동일하게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물론 우리가 함께 집회로 모일 때 그것은 역시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 안에 임재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진보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네 번째 우리가 진보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2절에서 모세는 그 모든 회중의 수를 세도록 명령을 받게 됩니다. 46절에 그 계수함을 입은 총계가 60만 3550명인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몇 가지 다시 돌아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됐을 때의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70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60만 3550명의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자와 아이들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다 하면 200만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70명에서 60만 3550명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너의 자손을 번성케 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 바로의 핍박 가운데서도 이렇게 번성한 것입니다. 그 애굽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이렇게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지금도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가 진보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신 지 이제 2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이 땅에는 12명의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제 천여명, 2천여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2천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이 세상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많은 실망이 있었습니다.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 그리스도인들은 성장하고 번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역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앞으로 가자라고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장소에서도 우리는 이 네 가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진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진보의 원리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진보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해서 방향을 잡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200만이 넘는 사람들을 방향을 잡고 인도해 낸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식량이 공급돼야 됩니다. 그냥 조금 겨우 간신히 먹여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먹여야 됩니다. 그들은 인도함을 받아야 됩니다. 어떠한 혼란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다른 사상자 없이 인도함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진보를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 원리를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1장과 2장에서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훈련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그 광야를 진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군인을 계수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성소를 둘러싼 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처음에 보게 될 때에 ‘아니 왜 이런 이야기가 여기 이렇게 길게 기록되어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긴 이름들이 그냥 열거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어떤 르우벤의 가족과 그 종족이 어떻게 됐고 그런 것들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또 유다의 가족들과 종족이 어떻고 저렇고 해가며 이렇게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6장에 가서는 이제 거의 쓰러질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2장에 이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여기 그 많은 이름들과 많은 숫자들이 나온 다음에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수가 다 세워졌고 그들이 잘 분류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그냥 의미 없이 단순히 열거된 것 같이 보입니다. 성경의 앞부분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아주 우리에게 흥미를 이끌어 아주 특별한 이야기들이 거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민수기 앞장에서는 아주 그냥 일상적인 그런 평범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기적도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숫자를 세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우리의 진보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훈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질서를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도 모든 것을 단정하게 질서 있게 행하라는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날들이 그냥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난 날들이 아닙니다. 그냥 대부분의 날들은 오히려 많은 날들은 그냥 일상적인 일을 반복하는 날들이었습니다.

모임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임의 모든 날들이 아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에서 여러 부흥의 때를 발견하게 되지만 또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지역 모임에서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특별 수양회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지역 모임이 이렇게 수양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지역 모임의 대부분의 날들은 그냥 정기적인 집회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냥 똑같은 기도 집회를 합니다. 똑같은 성경 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 인생의 진보를 위한 한 계단인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구름으로 가려진 어떤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 군인들을 하나하나 세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각 지파별로 그들이 게시됩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계수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기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냥 얼굴 없는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모임에 단지 한 숫자로 그냥 되는 한 사람일 뿐이야.’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계수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8절에서 이 군인을 계수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18절에서 자기 계통을 말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들은 자기가 진정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거기서 태어난 것을 증명해야 됩니다. 이들은 전쟁에 나가서 싸우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 출신인지가 분명해야 됩니다. 이것은 또한 영적으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느 종족에 속했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먼저 분명하게 정해져야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보를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우리의 출생에 대해서 분명하게 확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아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진보에 있어서는 조금도 결과를 보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입술로 말하고 있는 그들의 고백이 그들이 삶으로 살고 있는 간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러한 사람들과 친절하게 이제 질문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어떻게 언제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물어볼 때 그들은 그것을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의 전부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상당수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영적인 진보를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필수적인 것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 가운데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거듭남에 대해서 그 실체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직면하는 여러 어려움들을 이제 영적인 능력 가운데서 그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와 같이 그 종족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구글 검색 중에 자주 검색이 되는 주제 중에 하나는 그들의 조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뿌리를 찾는 데 구글을 이용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사람들이 취미로 그렇게 합니다. 호기심으로 그렇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진실이 아닙니다. 그냥 호기심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내가 그분의 것인가? 참으로 우리가 군인으로서 효과적으로 그 전투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가정의 아들이어야 됩니다. 내가 영적인 전쟁에 나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출생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됩니다.

저는 여러 이 세상에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운데서 수많은 정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영적인 삶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에 대해서 너무나 얕게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종족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그들은 자신의 명수를 말하게 됩니다.

20세 이상으로 그들을 계수하게 됩니다. 우리는 20절에 또 한 번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세 이상으로, 22절에 20세 이상으로, 24절에 또 나옵니다. 26절에도 20세 이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2장 마지막까지 20세 이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전쟁에 보내지 않습니다. 또한 여자를 그 전투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 싸움에 나가는 자는 이제 성숙함, 그의 존귀함을 특징으로 갖추고 있어야 됩니다. 또한 우리에게 영적으로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그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출생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출생을 먼저 보았고 성장에 대해서 두 번째로 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 연령이 20세 이상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은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한 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집회를 할 때마다 젊은 성도들이 많은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활발한 그 힘이 지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저는 나이 드신 성도님들을 보고 기뻐하게 됩니다. 형제님들은 최전선에서 수년간 싸워왔던 분들입니다. 그 머리에 백발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분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나이 든 갈렙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가 80세가 되었을 때 여전히 그는 높은 산에 올라 그 하나님이 주신 땅을 구하게 됩니다.

참으로 여러분에게 이러한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자리가 젊은이에게 또한 나이 드신 분에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군인들을 계수하는 데 있어서 빠져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1장을 읽어갈 때에 여기에 어떠한 무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갑옷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무기도 없습니다. 왜 이와 같은 것들이 여기 빠져 있는 것입니까? 이 군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기 위해서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의 대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총사령관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인을 격려하였습니다.

“우리 주 안에서 강하라”

우리 자신의 힘을 가지고 이 싸움을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명석함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으로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적하는 진을 무너뜨리는 강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2장에 나와 있는 성소를 둘러싼 진들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그림을 한 번만 보는 것으로 더 많은 설명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가운데 성소가 있고 12지파가 그 성소를 둘러싸서 진을 치게 됩니다. 세 지파가 동편에 있고 세 지파가 남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에 세 지파가 있고 북쪽에 세 지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은 이 모든 진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 진의 한 중앙의 초점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제가 이 진의 총 거리가 어느 정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성소를 둘러싸서 수천의 수많은 장막들이 그 광야 가운데 쳐져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한쪽 모서리에서 그 진이 쳐져 있는 다른 쪽 모서리까지를 거리를 잰다면 한 8마일 정도 이제 우리로 치자면 한 십 몇 km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를 둘러싸서 장막을 쳤을 때에 그 장막 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향하여 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장막 문을 걷어서 나오게 되면 아침에 제일 먼저 그들이 보는 것은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초점이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구석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모든 사람이 쉽게 나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동을 위해서 그 진이 짜여져 놓여 있는 것을 또한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른 장소로 옮기게 될 때에 이 오른쪽에 있는 새 지파가 먼저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세 지파가 그 다음으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성소가 그 다음에 그리고 이쪽에 세 지파가 움직이고 북쪽의 세 지파가 마지막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그들이 정지해 있을 때나 아니면 움직일 때나 항상 하나님의 성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삶에 잠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을 고려하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많은 해야 될 것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학교에서부터도 많은 숙제가 있습니다. 대학교 가면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여러 활동들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진보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학교에서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인 여러분 여러분의 직장에서 그 진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학교에서 그 진보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진보는 하나님의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세상에서 성공을 위해서 그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서 힘쓴다면 그 끝에는 항상 쓴 것을 실망을 맛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사다리를 높게 올라간다면 단지 세상의 사다리를 높게 올라간다면, 그 끝에 마지막에 여러분이 경험하는 것은 그 높이 올라간 사다리가 여러분을 다른 방향으로 짓눌러 내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젊은 많은 가능성이 있는 청년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다가 세상에 갇혀버린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그 청년들이 이제 세상 가운데서 완전히 중화되어버려서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보게 됩니다.

제가 이것을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진보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장 중심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역 모임을 가운데 두고 여러분의 삶을 꾸려 나가시길 바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그 중심 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장을 가운데 두고 그들의 삶을 운영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조금 시간이 남으면 그것을 모임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삶을 다시 중심을 바꿔야 됩니다. 영원한 것에 그 중심을 둬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중심을 둬야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것에 중심을 둬야 됩니다. 우리가 단지 이 세상 가운데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마지막에 단지 거품처럼 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만족하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먼저 훈련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도 사람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야 됩니다. 저도 역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여러 많은 압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당장의 시급한 압박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임시적인 압박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그 방향을 잃어버린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중심을 분명하게 깨끗하게 정리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한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채우고 있었던 그런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모셔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진의 중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어디에 칠 것인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장들을 살펴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는 여기 있고 유다 옆에 잇사갈이 있으라고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스블론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르우벤, 그 다음 시므온, 그 다음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과 단이 있고 아셀과 납달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자리에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냥 나는 여기 있기 싫어하고 저 납달리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혼동이 혼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갓은 여기에 있고 납달리는 저기에 있고 저기에 계속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리에 만족하고 지키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리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자기 옆에 있는 이웃에 있어서도 만족해야 됩니다. 아셀 지파가 나 옆에 있는 다는 것이 싫어라고 말하고 다른 데로 가고 싶어라고, 갓이 나하고 더 친한 친구인데 나는 그 옆에 있고 싶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옆에 있는 그 지파와 친하게 지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배우고 그 옆에 있는 다른 동료 신자들과 있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이와 같이 이 전체의 진은 주의 깊게 이렇게 조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훈련된 백성들입니다. 이 훈련된 백성들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진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고 나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여기저기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12지파가 함께 연합된 하나로서 그들은 전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이와 같은 진보가 있게 하시기를 우리가 계속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계속적으로 우리 이 교제를 풍성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