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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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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에 함께하게 되어 큰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함께 상고해 갈 때에 주님께서 복 주시리라 또한 믿습니다.

이곳 진해 모임에서 집회 기간 동안 저희는 함께 골로새서에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1:1-11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가 마포 모임의 3번의 집회에서는 데살로니가전서를 함께 보았습니다. 특별히 그 서신서에 나타난 삼중의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골로새서 이 서신서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서신에서는 삼중의 것이 아니라 이중적으로 나타난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서신서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아마 흔한 그런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이렇게 볼 때에 우리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 또한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될 때에 어떤 숫자와 관련해서 보게 될 때 흥미로운 것들을 더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사용한다면 그건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너무 인위적으로, 아주 피상적으로 다루게 되는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숫자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에 그런 숫자와 관련된 구조를 사용해서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마다 성경을 읽을 때에 그런 숫자의 의미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금방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창조의 날이 7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숫자들을 가지고 잘 조직돼 있고 구조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구조는 우리가 잘 조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단순하게 볼 때는 그냥 무작위로 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그것이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서신서와 관련해서는 숫자 2와 관련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숫자 2와 관련된 것은 성경에서 증거의 숫자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두 세 사람의 입으로 증거할 것이라는 구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2라는 숫자는 증거를 위해서 필요한 숫자이며, 3이라는 숫자는 충분한 증거를 말하고 있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지역교회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때 두 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두 세 사람이라는 것은 그래서 단지 적은 수의 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세 사람의 충분한 증거를 말하고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2라는 숫자는 또한 균형, 그 대칭을 말하는 숫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몸을 보게 될 때도 그 2라는 숫자가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귀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위 아래 두 입술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발이 있습니다. 그리고 폐가 두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장이 두 개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그 균형을 이렇게 좌우로 맞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다리만 있는 분은 걷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손이 하나밖에 없다면 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라는 숫자는 증거의 숫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균형의 숫자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두 개가 나오는 것이 서로 보조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비슷한 두 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개가 서로를 보조해주는 역할로서 두 개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오른손이 제 왼손과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두 개가 있지만 함께 서로 보조적으로 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와 관련된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라는 숫자는 또한 교재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서로 강하게 만들어주는 숫자입니다. 다시 한 번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주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인도하여 아담에게로 데려오시고 그들이 결합하여 한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른 존재입니다. 한 사람은 남성이고 한 사람은 여성이지만 그들이 합하여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거기에 강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성경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개념은 각각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입니다. 마치 우리의 두 손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과 아주 다르고 신약성경도 구약성경과 또 아주 다릅니다. 하지만 이 다른 것이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이 있어야 온전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두 개가 증거하고 있지만 하나의 성경으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이 두 개 판에 기록된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각각의 다른 돌판이지만 또한 그 율법은 완전히 하나의 율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 돌판에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담고 있습니다. 각각 다른 두 개의 돌판이지만 하나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또 비슷한 것으로 속죄소에 있는 두 개 그룹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죄소에 각각의 양 끝에 하나씩 그룹 천사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같이 2라는 숫자가 어떠한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지 여러 예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증거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교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차이로 나눠지는 것을 또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일하는 숫자가 처음 사용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둘째 날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나누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래에 있는 물과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행악자가 주님께서 못 박히실 때 양 옆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는 그 두 행악자를 영원히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골로새서를 우리가 2라는 숫자를 통해서 보게 될 그 배경으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1절부터 11절까지 읽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나눠지는 것이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사도는 개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부터 8절까지는 그 지식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근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골로새를 자기가 직접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들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들음이요”라고 했고, 또한 8절에서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라고 에바브라디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골로새에서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들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9절부터 11절까지는 그 알게 된 내용을 가지고 그 소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부분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부분을 나눠서 살펴보게 될 때에 여기에 많은 2라는 숫자가 담겨 있는 것을 살펴보게 됩니다.

1장 1절에서는 이 서신을 보내는 발신자가 이중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이름이 여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이고 하나는 디모데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과 관련돼서 두 가지 설명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 된 바울이라고 되어 있고, 그것은 권위를 말하는 용어입니다. 디모데는 현재 디모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애정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계속 읽어 나갈 때에 바울과 디모데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울이 보낸 서신서 중 6개의 서신서에서 바울이 자신과 디모데를 이와 같이 가깝게 연결시키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아주 독특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사도로서 다른 열두 제자와도 또 다른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다른 12 제자는 역사적인 주 예수님과 함께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사도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이 땅 가운데 있었던 주님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주님과 연결된 사도직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의 많은 서신서에서 하늘에 속한 것을 다루고, 바로 이 골로새서에서 이 독특한 경륜의 시대에 대해서 그가 제시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라고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사도가 되기 원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이 선택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디모데가 여기서 형제라고 언급된 것이 또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사실 바울의 서신서에서 디모데는 여러 가지 다른 호칭으로 불려집니다. 때때로 그는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종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동역자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형제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가정 안에 있는 것이 그 교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초두에 있는 이 1절에서 놀라운 그 조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와 형제”

 

이제 우리는 발신자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수신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2가지의 아주 흥미로운 2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신자들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도들이라고 불렀고 두 번째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한 번 이 두 가지 호칭은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그들은 하나님에 속한 그 성소에 합당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형제들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가정 안에 속하기에 합당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 호칭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성도들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며, 하나님의 가정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입니까? 그리고 이 놀라운 특권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온 이 놀라운 호칭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그러한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이름들에 대해서 그 위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울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들이라고 불릴 때는 우리가 형제로서 행해야 되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불릴 때는 우리가 또한 거룩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 단지 형제라고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형제들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지금 직면해 있는 상황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 골로새의 성도들은 지금 거짓 교리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신실한지 이제 시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된 교리에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에 계속적으로 신실하게 있을 것인가? 이 시험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편지의 초두부터 그 신실함의 중요성을 이렇게 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실함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많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유명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공적인 사역을 하는 그런 은사를 모두가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가 다 부자로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주 위대한 사역을 하는 그런 일로 부름을 모두가 받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형제님들이 또한 모든 자매님들이 각자가 다 신실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2절 후반부에는 또 다른 이중적인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했으며 또한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가 지금 누구한테 보내지고 있는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자들은 동시에 두 주소를 가진 장소에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동시에 그들은 골로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골로새에서 성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골로새에 살고 있지만 그것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성도들이 더 이상 골로새에 살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 사람씩 그 골로새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세대는 2천년 전에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지금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에 임시적으로 살고 있었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 오후에 모인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한국에서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북 아일랜드에 사는 것만큼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특권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세상을 위해서 살고 있고 그리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또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또한 육체적으로는 골로새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이 땅에 있지만 한쪽으로는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참으로 이 신자들을 호칭하고 있는 이런 표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런 이중적인 표현입니까?

우리는 단지 이 두 구절에서 이제 보내는 자들에 관련된 2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그리고 받는 자들과 관련된 2에 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구절에서는 다른 2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골로새서에는 계속해서 이중적인 2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2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공급과 관련된 숫자 2가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하고 있는 그의 인사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충만함입니다. 이 은혜라는 것은 헬라 문화의 그런 배경을 두고 있는 표현입니다.

잠깐 화이트 보드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로 은혜라는 단어를 여기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단어를 더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단어가 뭔가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밑줄 친 부분이 세 단어에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에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신약성경에서는 이 세 단어가 아주 가깝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가 cavri"(카리스)입니다. 은혜입니다.

두 번째 단어 eujcaristevw(유카리스테오)가 은혜로움을 말하며 감사드리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어가 carav(카라) 기쁘다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세 가지 단어가 우리에게 자주 적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또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기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서신서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이제 시작하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개가 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단지 구원의 은혜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의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이 아름다운 조합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것만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한 단어를 읽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대해서 읽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의 말씀을 읽어야 되고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리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1절과 2절에서 흥미로운 4개의 2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가 어떻게 골로새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흥미로운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들이 전해준 소식을 가지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들었다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나타낸 것들이 참으로 골로새 성도들이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그 대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나아가는 두 가지 방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직적인 방향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수평적인 방향으로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두 가지 측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다른 세상과 전혀 다른 우리를 구별하게 하는 속성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관계를 우리의 구주와 맺고 있으며 또한 특별한 관계를 다른 성도들과 맺고 있습니다.

 

5절에서 또 다른 이중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5절에서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또한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에서는 복음의 소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좀 떨어져 있지만 아주 중요한 이중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두 가지 것입니다. 복음에는 한편으로는 진리를 담고 있으며 또한 복음은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현 세상의 현대 시대가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세속적인 세상 가운데서 이 필요한 두 가지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무엇이 진리인지 그 개념조차 잊어버린 시대인 것입니다. 또한 이 시대는 소망이라는 것이 다 증발해버린 그런 사회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유명한 철학자가 수 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대문자 T로 시작되는 진리라는 것은 사실 죽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단지 감정을 따라 그냥 살아간다.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 이것을 판단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되다 이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단지 네가 어떻게 느끼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너가 그것이 참되고 진리라고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무엇이 실제인지 그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꾸며낸 환상적인 이야기 그런 것에 현혹됩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모두 흔들리는 그런 주관적인 것을 좇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진리가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또한 이 세상은 소망이 사라져버린 시대입니다. 이 세상은 깨어져버린 약속과 이제 무너져버린 그 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절망 가운데서 그렇게 낙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이 바로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그런 소식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없는 세상에 이 소망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복음으로써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지역 교회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반드시 전파돼야 되는 그런 소식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냥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는 그런 소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뒤처져 있는 별 상관없는 그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 반대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복음이 이토록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계속해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단지 그냥 조언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냥 좀 친절하게 사람들에게 잘 말해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그 사람이 가슴 깊이 가지고 있는 그 필요를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복음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 사람이 정말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견고하게 설 수 있는 진리이며 그가 미래를 소망 가운데 바라볼 수 있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복음의 소식인 것입니다. 과학이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치가 그것을 줄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복음만이 이 놀라운 진리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그 다음의 이중적인 것에 연결됩니다. 이 6절에서 복음이 어떻게 그들에게 이르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그들에게 이르렀을 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두 가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열매를 맺었고 두 번째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다시 한 번 아주 흥미로운 이중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특별히 발전하는 두 개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냥 죽어 있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 복음은 거기에 힘이 있고 그것을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여기서 열매를 맺고 자라는도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복음이 자라는 걸까요? 우리는 복음은 항상 그대로인 그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사도는 그 복음이 자란다고 하고 또 온 천하에서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것은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기 전에는 사실상 그들의 삶은 정글에서 사는 삶과 같았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인생의 전부는 황무지와 같은 하나님께 유용하게 사용되지 못하는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의 씨앗이 그들 마음속에 뿌려졌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은 이제 갑자기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어떤 생명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은 그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열매를 맺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또한 여기서 열매를 맺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잘하는 것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다른 회심자들이 또 생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고 이제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또 그것을 보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고 이제 그것을 본 다른 사람이 그 복음을 믿고 또 그들에게도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복음의 기적이 온 천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이렇게 방문하게 되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참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북 아일랜드에서 복음이 그렇게 능력 있게 역사하는 것을 또한 한국에서도 그 복음이 동일하게 능력 있게 역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여기 말씀과 같이 이 복음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 다른 사람에게 변화되고 이것을 모든 나라에서 모든 대륙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국제적으로 복음화가 된다는 것은 참 어떻게 보면 어떤 극적인 것입니다.

아주 소수의 것만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어떤 특별한 문화가 한국에서는 인기가 있는데 또 다른 나라 북아일랜드에서는 별로 시들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북아일랜드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는 것이 북미에 가서는 또 그것이 잘 안 되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어느 나라에 가나 어느 대륙에 가나 어느 세계에 가나 동일하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게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복음 메시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 말씀을 우리의 힘을 다해 우리의 확신 가운데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계속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그 복음 메시지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를 보았을 때 그 고린도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1장부터 그는 복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또 하나는 갈라디아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장부터 그는 다시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골루새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성도들은 지금 거짓 교리의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다시 1장부터 사도는 그들을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순전함과 그 복음의 능력은 지역교회의 간증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제 다른 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 골로새의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는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 자신이 그 골로새에 직접 방문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의 입국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우리가 골로새가 언급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 나온 그때 당시에 여러 유명한 성들에 비교해 봤을 때 골로새의 성은 가장 작은 도시입니다. 빌립보성은 아주 중요한 도읍입니다. 그리고 고린도는 항구가 두 개가 있는 아주 큰 도시입니다. 에베소 성은 아주 큰 영역을 가지고 있는 성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만 해도 2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큰 도시입니다.

근데 골로새는 아주 작은 도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그곳에 방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 사람들은 참된 복음을 들었던 걸까? 그들은 그 지역의 형제로부터 여기 이름이 기록된 에바브라부터 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문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곳에 아주 뛰어나 보이는 그런 거짓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 왔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새로워 그럴 듯해 보이는 그런 교리들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 그 에바브라라는 형제는 당신들에게 그 복음의 전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맞지만 그가 전부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 거짓 교사들은 당신들이 100%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면 에바브라에게 들은 것 외에 다른 것들이 더 필요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바브라가 전한 것이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에바브라가 전한 복음이 정말 충분한 온전한 복음인가? 아니면 그들은 더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이 두 가지 이중의 것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7절에서 사도가 에바브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는 에바브라에게 아주 놀라운 이중적인 천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사도 바울은 이 에바브라에게 온전하게 그의 신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참된 복음이다. 그는 나와 동등한 그런 일꾼이다. 나와 동일한 그 위치에서 전한 것이다. 내가 골로새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은 바로 에바브라가 그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이다. 나와 관련돼서는 나와 동일한 동역자이며, 너희와 관련돼서는 너희의 신실한 일꾼이다.”

 

이제 마지막 부분인 사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그의 지식과 관련된 이중적인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6절에서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에바브라는 복음의 은혜를 전한 것입니다.

이 골로새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너희들은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그것 외에 또한 할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또한 다른 의식이 필요하다라고 거짓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철학과 다른 신화들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바브라가 가르쳤던 그 복음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그 은혜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의 어떤 다른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만 필요하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바브라로부터 복음을 들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보배롭고 중요한 지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지식이 없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너의 행위가 필요하다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너의 선한 행위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이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것은 제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그 근거는 이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잘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여러분이 얼마나 능력 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성과를 내면 그 직장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계속해서 일하고 더 해 나가야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에 근거를 두고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보배로운 지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9절에서 이제 사도가 두 번째로 이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을 말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을 말했고 두 번째 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중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 지식은 10절에 보듯이 우리가 어떻게 걸어가느냐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이 두 가지 이중적인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역시 또한 이 지식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9절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있습니다. 두 개가 서로 보조적인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깨닫는 지식과 또한 지혜와 총명이라는 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생각이 성경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차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이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 이동하는지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앞에서 9절에서 지식과 지혜와 총명을 말했고 또한 10절에서 그리고 나서 합당히 걸어가는 것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내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 의지가 내 걸음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어떻게 행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에 10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내 걸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내 걸음이 나의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나의 일이 이제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치기 전에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처음이 우리의 생각 가운데서 시작이 됩니다. 이 생각이 성경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지면 자동적으로 내가 어떻게 걸어가는지를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볼 이중적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1절에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에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두 개가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입니다.

이 견딤과 오래 참음이 무엇인지 아마도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 차이는 이것입니다. 견딤은 어려운 상황을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을 다뤄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견뎌나가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참아가면서 사도는 말하기를 기쁨으로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꽉 물고 그냥 한번 이렇게 견뎌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견디고 오래 참으면서 불만 가운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웃으면서 기쁨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서부터 능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뛰어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11개 구절에서 11개의 2가지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