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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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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다시 한 번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복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나 있는 3에 대해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3장에 5절까지와 4장의 12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3장 1-5절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4장 1-12절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데살로니가 그 도시에 사도 바울이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그 회심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염려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보면서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이렇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게 될 때에 대부분의 기록된 것들은 이제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서신서에 오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는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역의 장소에서 주님께서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그 사역자들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특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 마을에서 사역하기 위해서 사역자들을 택할 때에, 그 마을에 속해 있던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들은 모두 가버나움과 또한 베세다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오게 되면 주님께서는 다른 종들을 택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세기에 큰 도시에 복음을 들고 들어갔던 그 사역자는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마을의 사람이 아니었고, 큰 도시인 다소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 처음 사역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예상치 못한 그런 시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행은 이제 국제적인 도시인 로마에서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는 복음을 들고 방문했던 많은 도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바로 이 다소성의 사람으로서, 그는 여러 도시를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도시는 그들만의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로마 제국의 여러 성들은 사실 각각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각 도시가 필요했던 바로 그것을 이 복음이 공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성은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데살로니가는 공업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1세기의 기준으로 봐도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15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도시는 안디옥이었는데, 거기는 30만의 인구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는 지적인 도시인 아덴을 또한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50마리 떨어져 있는, 이제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라는 도시를 또한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250마일이 떨어져 있는 바다 건너에 있는 에베소 거기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각 도시는 각각의 특징이 있었고, 그리고 복음은 각 도시에 영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도시에서 사는 것은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우리에게 안겨다 줍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도 21세기에 여러 가지 문화적인 도전을 여러분이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참으로 격려가 되는 것은 그때 당시에 그 많은 문제 가운데서도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복음은 능력이 되었고, 또한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그 복음이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사도가 능력으로 그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단지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는 목자로서 사역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라가는 것에 또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3장과 4장에서 그 새로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돌봄을 찾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그 3에 관련된 것은 그들의 믿음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염려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것에 대해서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것은 이제 동료가 그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영어 성경과 또 한국어 성경이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좀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 똑같은 표현이 3개가 나오는데 한국어에는 두 개가 나올 때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3장에서 디모데에게 세 가지 것을 영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2절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말 성경과 좀 다르지만 영어 성경에는 그리스도 복음의 동역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역자에 대해서 한국어 성경에는 없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그 3에 대한 것을 잃어버린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두고 제가 다른 하나를 또 찾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3장의 초반부에는 그 동료와 그리고 새로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믿음에 대한 사도의 염려가 여기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 사도 바울이 언급한 그 세 가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그 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꽤 긴 여행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아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함께 나중에 오게 됩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아주 급하게 빠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새로 구원받은 자들을 데살로니가 있는 그 성도들에 대해서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 중에 하나는 그들이 받고 있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어려움은 그에게 가해지는 거짓된 고소, 그리고 다른 복음 전도자들에게 대해서 비방하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어려움은 슬픔이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사도는 그와 같은 회심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이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모데와 실루아노를 다시 마게도냐로 보내게 됩니다.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고, 그리고 실루아노를 아마도 빌립보로 다시 보내게 됩니다. 사도는 이 방문하는 두 전도자들이 그 두 도시를 격려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우리는 이와 같이 방문해서 격려하는 일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이렇게 형제들이 와서 방문할 때에 우리는 많은 도움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역시 지역에 은사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합니다. 하지만 또한 주님께서는 다른 지역 사람들의 은사를 사용해서 또 이곳의 성도들을 돕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그 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한 것입니다. 아덴에서 데살로니가 성까지는 편도로 200마일이 되는 그런 거리입니다. 우선 3장 1절에서 사도는 그가 홀로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입장에서는 디모데를 떠나보내는 게 그에게 있어서는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테네에서 사도는 혼자 외롭게 지내야 합니다. 아덴에 사도와 함께 디모데와 실루아노가 있었다면 사도에게 많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들의 도움과 교재를 이제 자기를 위해서는 희생하고 데살로니가로 그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격려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희생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제 이 장에서 세 번째로 사도가 회심자들을 돕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3장 마지막 부분에 이 신자들을 위해서 사도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 믿음을 염려하는 사도가 그것을 돕기 위해서 하고 있는 세 가지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로 그가 보낸 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가 자기를 희생한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가 드리고 있는 간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한 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3장에서 이제 다른 삼중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이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디모데가 그 소식을 가지고 올 때쯤 사도는 아덴에서 고린도로 옮겨 갔습니다. 디모데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그 소식으로 인해서 자신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 8절, 9절에서 세 가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위로를 받았노라”, 그리고 8절에 “이제는 살리라”, 그리고 9절에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참으로 그는 안도하면서 우리가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처럼 그런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신자들이 충성되게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은 그에게 참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참으로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신실하게 있다는 소식은 항상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단지 회심의 순간에 그 믿음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리고 굳게 서 있다는 것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서에서 그렇게 말한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이 3장에서 사도는 그들의 믿음에 관해서 가장 큰 염려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5번에 걸쳐서 나오게 됩니다.

2절에서 너희 믿음에 대하여, 5절에서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6절에 너희 믿음과 그리고 7절에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10절 마지막 부분에 믿음의 부족함을, 그리고 3절에서 그 환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큰 어려운 시험 가운데서 요동하지 않고 신자들이 굳게 믿음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그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그들을 넘어뜨리게 할까 염려하고 있는 것을 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그들을 시험할까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탄이 예를 들어서 복음이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 준 게 아니라 문제만 가져다 주었다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그들의 길에 이제 어려우니까 포기해 버리자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제 쉬운 길로 가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제 좀 부드러운 길로 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여러 번 자주 이용하는 그러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도 사탄이 그렇게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은 주님에게 고난을 받지 말고 그럴 필요가 없다. 쉬운 길로 가십시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동일하게 그러한 시험을 우리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들의 믿음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4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4장에서는 그가 어떤 명령을 주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1절에서 그들이 행하는 것을 말하였는데 두 가지 3에 대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절에 첫 번째가 구하고 그리고 두 번째가 권면하노니 그리고 2절에 명령이 나옵니다. 그래서 구하는 것이 있고 권면하는 것이 있고 명령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것은 그의 순전한 동기, 그의 권위 그리고 이것이 시급하게 해야 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과 2절에 또 하나의 3의 것이 나오는데 그들이 어떻게 행할 것인지,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 그리고 세 번째로 더욱 많이 힘쓰라.

첫 번째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의 스타일을 가져야 되는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걸어가는 것 행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바로 전장인 3장에서는 굳게 서서라는 것, 즉 서 있다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달리는 것을 또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많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행하는 것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걸어간다는 것은 꾸준하게 계속해서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여러 여행의 경로를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평지를 또한 자전거를 타거나 또는 자동차를 타고 가거나 이렇게 가게 됩니다. 신약시대에는 오늘날 같은 다른 어떠한 교통수단이 없었습니다. 어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그냥 걸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모습은 매일매일 반복해서 꾸준하게 이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로를 꾸준하게 밟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는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의 동기가 무엇인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기에 대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뜻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뭔가 대단한 보이는 아주 큰 일을 한 번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순종해서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동적으로 에녹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기록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곳에서는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똑같은 증거를 우리 모두가 받기를 바랍니다.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어떤 양을 추구해야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삼중의 것의 세 번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걸어가는 것, 행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1절 마지막 부분에 세 번째 것이 나옵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냥 딱 정해진 양만 하고 마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계속적으로 진보하는 것입니다. 발전하는 것이고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4장 10절에서 이 권고를 다시 한 번 듣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동일한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더 많이 하고” 그러나 때때로 슬프게도 우리는 더 적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보다 더 적게 하려고 합니다. 점점 세월이 지나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집회를 적게 참석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점점 덜 보게 됩니다. 예전보다 더 적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나그네로서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뒤로 가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걸음을 걸어야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돼서 다른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절에서는 그와 관련된 다른 주제를 언급하게 됩니다. 사도는 그들 지체 가운데서 정결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 나와 있듯이 이 하나님의 뜻은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주제인 거룩함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계속적으로 나오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도전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의 성화에 대해서 동일한 주제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7장에 그 동일한 성화에 대한 주제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에도 그런 성화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신자들이 살고 있는 그 사회가 얼마나 죄악된 사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부패해져 있고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져 있는 그러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계속적으로 거룩함에 대해서 권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거룩함이라는 것은 그냥 있으면 좋고 하는 옵션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항상 유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두 개의 큰 그룹으로 나눠서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두 개의 아주 큰 단어로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그룹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속성은 다른 존재에게 나눠줄 수 있는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줄 수 없는 세 가지 속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더 있는 것이지만 이제 그 중에 대표적으로 세 가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전능하심 그리고 전지하심 그리고 어느 곳에나 계시는 편재하심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 속성은 다른 존재에게 나눠줄 수 없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것을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고 그래서 우리도 인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되시고 그래서 우리도 참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의로우시고 그래서 우리도 의로워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회에서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성경에서 그리고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리고 이제 사도가 그런 것처럼. 그러면 이 거룩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 다음 구절들을 통해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 중에서 아주 중요한 삼중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거룩함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영어 단어 넷이라는 것을 앞에 두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성경에는 동일한 형식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것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의 이 세 가지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가 3절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여기에 대시 사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넓은 요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음란이라는 것은 모든 종류의 성적인 부도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기준이 요구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리고 결혼으로 그런 결합을 하도록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외에 다른 모든 성적인 행동은 음란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성적인 방탕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사회입니다.

이 3절에서는 음란을 버리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버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것은 역시 두 단어로 연결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이 후반부에 있는 것이 이제 붙잡다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 앞부분이 그로서 떨어지다 멀어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모든 다른 음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우리를 붙잡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과 관련돼서 이제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넘어지기 직전까지 최대한 할 수 있는 한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단어 자체는 그런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겪고 있던 그 문제들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그런 문제와 동일합니다. 우리가 지도에서 보다시피 데살로니가는 항구 도시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그런 여행객들 방문객들 그런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란한 것은 아주 쉽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쉽게 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그게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이것은 그냥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라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께서는 새로 구원받은 신자들이 그와 같은 삶의 모습은 더 이상 신자들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요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가 유혹을 받았을 때 그는 도망가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 유혹이 닥쳤을 때에 그것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적인 죄에 넘어진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런 유혹을 즐겼던 것입니다. 아주 너무나 가까이 가버린 것입니다. 그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넘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넘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끗함과 관련된 삶 중의 첫 번째 것은 음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삼중의 것을 보겠습니다.

4절에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이 문제와 관련돼서 이제는 이번에는 긍정적인 면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정한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라고 먼저 말했고 이제 여기서는 이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우리가 취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어 성경에서는 아내가 그릇이라고 돼 있는데요 이 그릇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해야 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그릇이라고 자기 안에 해당하는 그릇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우리 몸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간의 몸은 깨끗함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또 부정한 것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여기 영어에는 그 남자의 그릇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이 4절 앞부분에 각각이라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건 나이 많으신 분이건, 형제건 자매건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주의 깊게 행해야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 부도덕한 것들을 장려하는 사회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의 정욕을 자극시키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격려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우리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입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 손으로 무엇을 이 타이핑을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입으로 뭔가 부도덕한 것을 연상케 하는 그런 농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손으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은 내 입을 주관하는 것이고 내 손도 주관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또한 내 눈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이 눈을 이용해서 포르노 사진이 있는 웹사이트를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사회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에 대해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눈 앞에 이제 뭔가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옷을 입어야 되는지도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이제 자매님들에 대해서 특별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사회는 단정함이라는 것이 결여돼 있는 사회입니다. 그 여성의 옷이 그 정욕을 자극하는 데 특별히 고안돼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은 어떤 종류의 옷이 그런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어떤 것이 나한테 관심을 끌도록 이렇게 만들어지는 옷인가 아닌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그냥 단지 싸구려 정욕을 위해서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이 거룩함의 삼중의 것에 3번째 것을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음란을 버리고였습니다. 두 번째가 우리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우리가 모든 간음으로부터 간음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6절을 보게 될 때에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 약간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일의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성적인 부도덕함을 말하고 있는 문맥을 함께 염두에 둬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떤 형제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인을 취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분수를 넘어서 훔친 것입니다. 그 다른 사람의 부인은 그의 분수를 넘어 있는 경계를 넘어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다윗 왕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부인을 보았고 사람을 보내서 그를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것은 훔치는 것이었으며 또한 간음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혼에 대해서 가장 존귀하게 우리가 대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이 사회는 결혼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그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그 결혼을 존귀하게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거룩함에 대해서 삼중의 것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에게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그 거룩함을 그 기준을 우리가 지킬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부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한 가지 문제입니다. 그 우리 주위가 우리가 너무나 쉽게 그런 부정한 것을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제의 외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맛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저급한 그런 정욕을 만족시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북아일랜드에서 종종 에스키모인들이 어떻게 북극곰을 잡는지 이야기를 이렇게 하곤 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은 아주 날카로운 나이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제 물개 피를 바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얼음덩이에다 꽂아서 그 뾰족한 부분이 위로 올라오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북극곰이 나타났을 때에 그리고 그는 공기의 냄새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피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묻어있는 나이프에 흥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얼음덩이를 지나가지고 그가 원하고 있던 그곳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왔을 때 그 칼에 묻어 있는 피를 핥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여기 더 많은 피가 주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 그리고 그것을 더 핥아 먹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칼에 묻은 피를 살피면서 자신의 피를 자신의 피가 흘려져 있는지를 모르고 그것을 계속 핥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쓰러지고 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채우면서 스스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키사 이러한 죄에서 보존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드린 것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거룩함에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음란을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의 부인을 취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그렇게 강조해서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세 가지 거룩함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동기, 이 거룩함을 우리가 유지하게 하는 세 가지 것의 첫 번째는 6절 후반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주님께서 그 성적인 부도덕함에 대해서 반드시 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죄는 자주 은밀하게 행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늘에서 그것에 대해서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주제로 잠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 대가는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성적인 죄를 저질렀고 그리고 그 가정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과 추억 가운데서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지었던 그런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항상 불편한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얼굴이 붉어지지 않고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좋은 그런 복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예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그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에 이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너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죄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다루심에 있어서 다윗의 아들들이 죽게 됩니다.

항상 우리 신자 여러분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그 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격려를 보겠습니다.

7절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루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장 12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 7절에서는 “부정케 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케 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그 영원한 나라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 가운데서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8절에 있습니다.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불경건한 사회 가운데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세 가지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를 부정이 아니라 거룩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그 성령님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성령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성령님의 능력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순간 모든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것에서 아주 취약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이것을 진지하게 상고해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는데요. 이제 마지막에 삼중의 것을 하나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그들의 교제를 위해서 사랑을 촉구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9절에서 이제 새로운 주제를 사도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7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정욕이 아니라 이제 9절부터는 형제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의 사랑과 관련해서 세 가지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그 깊이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가정 안에서 형제 사랑입니다. 그 마음 깊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그의 사랑의 높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 깊이에 대해서 말했고 두 번째로 그 높이에 대해서 말했으며 세 번째로 10절에서 이제 넓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제를 대하여”

이와 같은 사랑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형제 사랑이 참으로 그가 새로 거듭났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제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세 가지 것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영어 성경에는 다시 한 번 이 삼중의 것에 대해서 ??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 성경에는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더 많이 하고 그것은 계속 증가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항상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11절 자체에도 다른 하나의 또 다른 삼중의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종용하고 두 번째가 자기 일을 하고 세 번째가 너희 손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참으로 부지런해야 됩니다. 아주 자원해서 일하는 그런 사역자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참 게으르고 별로 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주 나쁜 간증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때 당시에 1세기의 사회에서는 손으로 하는 그러한 일들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여기서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그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인류의 역사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을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좀 듣고 그런 일을 떠벌리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형제 사랑의 특징은 자기 일을 하고 그런 것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1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외인들을 향하여 좋은 간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