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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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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메칼리스터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주제를 고려할 때, 그 구절을 자세히 살펴서 그 의미를 확인하고, 많은 오류에 대응하기 위해 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마음에 부담을 줄 수 있고 또한 경건한 측면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번 달의 글은 이러한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언급된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하고 독자가 묵상할 수 있도록 남겨두겠습니다.

 

그분의 행보

요한복음 1:36절에서 우리는 침례 요한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실 때에 그분을 보고 이르되,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문자 그대로 주 예수님의 걷는 모습을 가리키지만, 그분의 삶의 방식인 그분의 행보를 적절하게 상징합니다. 그분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분의 성품을 온전히 따라 걸어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해 내가 그분을 기쁘게 하는 그것들을 항상 행하기 때문이라”( 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침례와 변모라는 두 가지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께서는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3:17; 17: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으신 것같이 자기도 그렇게 걸어야만 하느니라”(요일 2:6)고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씀하시나니”( 3:34)라고 간결하게 말합니다. 적대적인 청중조차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들에 놀라”( 4:22)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따뜻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6:67-68).

 

그분의 일

침례 요한은 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에 대한 강력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행적은 더욱 위대한 증거였습니다. 주님은 내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나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끝마치게 하시는 일들 즉 내가 행하는 바로 그 일들이 나에 대하여 증언하되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언하며”( 5:36)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독특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른 어떤 사람도 행하지 않은 일들”( 15:24)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의 행적을 본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잘하셨도다. 그분께서 귀먹은 자들도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자들도 말하게 하신다”( 7:37). 주님이 하늘로 돌아간 후 베드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논평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 하나님께서 성령님과 권능으로 그분께 기름을 부으시매 그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모든 자들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 10:38).

 

그분의 뜻

예수님은 나는 내 뜻을 행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내려왔느니라”( 6:38)고 확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다르다는 뜻이 아니며, 그분이 자신의 뜻을 따랐더라면 하셨을 일과 다른 일을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아닙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자신을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면서(특히 41절과 42절 참조), 자신이 땅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설득 작업의 일환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온 사람처럼)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기회에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 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 시편 40편을 인용하여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두루마리 책에 나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10:7)라고 썼습니다.

 

그분의 지혜

예수님은 어렸을 때 지혜로 충만”( 2:40)하셨습니다. 성인이 되셨을 때,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동료 동포들이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 지혜와 이런 강력한 일들을 얻었느냐?”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13:54).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분의 지혜에 거듭 감탄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의 말씀으로 올무에 얽어맬까”(15) 했던 여러 무리들과 예수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그 놀라운 예입니다. 이 장에 대한 마태의 결론은 얼마나 적절한가: “아무도 그분께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고 그 날 이후로는 감히 아무도 그분께 더 질문하지 아니하더라”(46).

 

그분의 길

선생님은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나이다”( 20:21)는 말씀은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옳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길을 진실하게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진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그분의 온유함. 그분은 온유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5:5)라는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11:29). 왕이신 그분은 세상의 왕들과는 정반대로 온유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2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고후 10:1)에 대해 썼습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예가 인용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언어는 그분의 사랑, 긍휼, 온유, 인내 및 기타 수많은 은혜의 방식을 정의롭게 구현하는 데 실패합니다.

 

우리에게는 장점약점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갖추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얻을 필요가 없는 좋은 성품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에게는 개선이 필요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미덕이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메리 피터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이름은 모든 은혜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를 아우릅니다;

  오직 영만이 추적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추적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