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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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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메칼리스터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 안에서만 완전한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도덕적 탁월함이 충만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그림의 반대편으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셨고 어떤 분이신지 보았으니 이제 그분이 어떤 분이 아니신지, 즉 죄의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 주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몇 가지 언급을 살펴본 다음 서신서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은 자신을 적대시하고 자신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는 유대인 무리와 대화하시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말씀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내게 죄가 있다고 확증하겠느냐?”(46절). 다시 말해, 그들 중에 그분께 대적하여 죄가 있다는 혐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굳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들 중 누구라도 그분의 삶에서 어떤 잘못이 있거나 그분의 말씀에서 어떤 거짓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대답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의 대답은 논쟁에서 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용하는 것, 즉 이름 부르기였습니다 (“네가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린 자라” 48절).

다음 장에서 주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이 매우 짜증스러워하는 맹인을 고치셨습니다. 치유받은 사람과 계속되는 말싸움은 여러 가지 이유로 흥미롭지만, 그 중 하나는 주님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려는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입니다(요한 9:13-34). 이 장이 끝날 무렵, 그 사람은 주님을 죄인이라고 말하기는커녕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고(35-38절), 지도자들은 그들의 노력에 좌절하고 주님에 의해 사법적 실명으로 정죄받았습니다(39-41절). 우리 주님의 인격과 완전하심을 부인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주님을 빌라도 앞에 데려왔을 때, 그들의 목적은 주님이 범죄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히 지금이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재판의 기록은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비난했는데(눅 23:2), 사실 그 주 초에 예수님은 (세금 납부에 관한 토론의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가이사에게 바칠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 눅 20:25). (가볍게 말하자면) 증거가 부족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요 19:4,6)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주님께서 죽음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일 뿐이며, 그 자체가 주님의 죄가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더 나아가 주님을 “이 의로운 사람”(마 27:24)이라고 부르며, 같은 장의 앞부분에서 주님을 “그 의로운 사람”(19절)이라고 불렀던 아내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또한 도둑은 예수님이 “아무 잘못이 없다”(눅 23:41)고 말했고, 같은 장의 후반부에 십자가에 달린 백부장은 “이 사람은 확실히 의로운 사람”(47절)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서신서를 살펴보면, 주님과 친밀하게 지냈던 베드로가 첫 번째 서신에서 주 예수님에 대해 “죄가 없으신 분”(2:22)이라고 솔직하게 말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죄 없음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입에서 간사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주님은 행동뿐 아니라 말씀에서도 죄가 없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사야 53:9절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주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은 그분의 죄 없음을 증거합니다.

 

이전 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1:19)에 비유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 없는”(출 12:5) 어린 양을 잡아야 했던 유월절을 분명히 암시하는 것입니다. 흠이 있는 양은 완벽하지 않은 양으로 선택될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 양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형이기 때문에 흠이 없어야 한다는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7:26절에 “이는 그러한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합당하셨기 때문이라. 그분은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며 더러움이 없으시고”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설명은 세 가지 다른 영역을 가리킨다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강조하고, “무해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강조하며,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분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바라보든 그 메시지는 강조됩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절에서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죄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의 존재를 알지 못했거나 죄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죄가 그분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인격의 모든 면에서 완전히 순수하셨고, 물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고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분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흠이 없으심”의 의미입니다. 이 기사에서 살펴본 구절은 그것을 강력하게 암시하지만 다음 달에는 그분의 유언에서 성경도 그것을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